• 입력 2024.02.28 17:55

3·1절 특집

얼룩덜룩 색이 바랜 붉은 벽돌,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두꺼운 철문. 그 사이로 높게 치솟은 담장이 안과 밖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있어요.

여기는 서울 서대문구의 ‘서대문형무소역사관’ (이하 역사관). 오랜 세월 실제 감옥으로 사용된 공간이에요. 나라를 빼앗겼던 일제강점기(1910~1945)에 수많은 독립운동가가 갇혔던 장소이기도 하죠. 3·1절을 2주일 앞둔 지난 16일(금), 이곳을 찾아 돌아 보며 그날의 함성을 되새겼어요.

10배 불어난 재소자, 감시당한 인물만 4,858명

정문을 통과하면 곧바로 마주하는 2층 건물.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한 지붕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와요. 이곳의 옛 이름은 ‘보안과 청사’. 역사관이 감옥으로 운영되던 시기에는 사무실로 쓰였어요. 지금은 관람객이 가장 먼저 들르는 전시관으로 바뀌어 당시 역사와 유물을 소개하고 있죠.

자료에 따르면 감옥이 지어진 첫해(1908)에 옥살이를 하고 있던 사람은 전국에 2,424명. 그러나 광복을 앞둔 1943년에 이르면 23,532명으로 약 10배나 불어났어요. 수감 인원이 급격히 늘어난 시점은 한일병합(1910) 무렵과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 그때마다 감옥 규모도 커졌어요.

2층으로 올라오니 독특한 전시실이 있어요. 손바닥만 한 종이카드를 한 장씩 이어 붙여, 넓은 벽면을 한가득 채워놓았죠. 흑백 인물사진도 하나씩 들어있어요. 이 카드의 이름은 ‘수형기록표’. 일본 경찰이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를 추적하고 체포하는 과정에서 만든 자료예요. 현재까지 남아있는 분량만 약 5천 장으로, 일제가 우리나라의 독립을 얼마만큼 억눌렀는지 ‘숫자’로 드러나요.

수형기록표에 남은 시기별 도산 안창호 선생(1878~ 1938). ① 임시정부 초기인 1919년, ②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연루되어 옥에 갇힌 1932년, ③ 생애 마지막으로 투옥된 1937년의 모습이다. [사진-서대문형무소역사관]
수형기록표에 남은 시기별 도산 안창호 선생(1878~ 1938). ① 임시정부 초기인 1919년, ②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공원 의거에 연루되어 옥에 갇힌 1932년, ③ 생애 마지막으로 투옥된 1937년의 모습이다. [사진-서대문형무소역사관]

추위와 어둠, 그 시절처럼 짙어

이곳에서 눈에 가장 자주 띈 것이 숫자라면, 피부로 느껴지는 것은 추위였어요. 날씨 탓만은 아니었어요. 전시관 지하는 오싹한 분위기에 몸이 떨려요. 햇빛도 거의 들지 않아서 어둡죠. 남자 어른은 양팔을 뻗기도 비좁을 만큼 좁은 복도는 답담함을 더했어요.

보안과 청사 지하 구역은 독립운동가를 조사하고 고문하는 공간이었어요. 지금도 남아 있는 흔적 중 하나가 ‘벽관’이죠. 공중목욕탕 옷장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사람을 가두는 고문 도구였어요. 여기에 갇힌 사람은 제대로 앉을 수도, 서 있을 수도 없어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버티는 고통을 받았다고 해요.

유관순 열사 순국한 ‘여옥사 8호 감방’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이 겪은 괴로움은 고문만이 아니었어요. 하루의 대부분을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며 보냈죠. 감방은 춥고 비좁았어요. 직접 재어 본 감방의 크기는 평균 10㎡. 3평 남짓한 크기의 방에 30~40명이 갇혔다고 해요. 당연히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죠.

3·1 운동의 상징 같은 유관순(1902~1920) 열사가 숨을 거둔 여옥사 8호 감방은 더 작아요. 이렇듯 참담한 상황에서도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많은 분들의 숭고한 희생에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나라를 구하려면 자기 목숨을 내놔야지.”

전시관 지하 구역의 증언 영상 속에 나오는 이병희(1918~2012) 애국지사의 목소리예요. 이 말이 오래도록 귓가를 맴돌았어요. 힘겹게 국권을 되찾았지만, 그 소중함은 조금 옅어진 오늘날. 3·1절 105주년을 맞아, 자유와 독립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해요.

3·1운동으로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관과 그 주변에는 함께 둘러볼 만한 장소가 두 곳 더 있어요. 선열의 나라 사랑 을 본받고,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을 일깨울 수 있는 공간이에요. 실내와 야외로 나 누어 살펴보아요.

#실내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전국으로 퍼져나간 3·1운동을 통해서 우리 민족은 독립의 뜻을 재확인했어요. 이를 이어받아 1919년 3~4월 사이 한성(서울),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중국 상하이 세 곳에서 임시정부가 생겨났습니다. 곧이어 모두의 힘을 모아 일제에 조직적으로 맞서자는 목소리도 나왔죠.

같은 해 9월 11일, 3개 정부는 상하이에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했어요. 이후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무려 27년 동안 임시정부는 여러 독립운동가의 ‘큰집’ 역할을 맡았어요.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은 서대문 형무소역사관의 바로 옆에 세워졌습니다. 이곳에서는 임시정부의 다양한 모습을 만나볼 수 있어요. 이봉창·윤봉길 의사의 활약상, 독립군이 사용한 무기와 군복, 외교 활동을 알리기 위해 제작한 책자 등이 전시되어 있죠.

이 밖에도 임시정부가 꿈꿨던 대한민국을 여러 자료를 통해 바라볼 수 있어요. 우리나라의 뿌리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더 알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해요.
■ 입장료 무료 / 매일 10시~18시 개관 (월요일 휴관)

#야외 #독립문 #독립관

독립문의 모습. 앞쪽에 놓인 거대한 돌기둥은 옛 영은문의 주춧돌이다. 우측 사진은 그 옆에 위치한 독립관.
독립문의 모습. 앞쪽에 놓인 거대한 돌기둥은 옛 영은문의 주춧돌이다. 우측 사진은 그 옆에 위치한 독립관.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을 기준으로 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과는 반대편. 시민을 위한 공원을 지나 잠시 걷다 보면, 독립문과 독립관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원래 이곳에는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과 잔치를 열던 모화관이 세워져 있었어요. 1896년, 《독립신문》을 만든 서재필(1864~1951)을 중심으로 이 문을 헐고 새롭게 ‘독립문’을 세우자는 주장이 나왔어요. 이후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떠 독립문을 완성했고, 모화관 역시 ‘독립관’으로 고쳐 지었습니다.

당시의 ‘독립’은 외세, 특히 중국(청나라)의 간섭을 물리치자는 뜻이 강했어요. 그러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본으로부터의 독립으로 의미가 확장됐어요.

독립문 곁에 있는 독립관에는 순국선열의 위패가 모셔져 있어요. 주변에는 독립운동에 헌신한 여러 위인의 동상과 기념탑도 자리하고 있죠. 이곳을 산책할 기회가 생긴다면,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지며 마음을 가다듬어보면 어떨까요?

김정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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